‘무슨 말도 안 되고 모진 말과 행동’을 내가 보더라도 그것에 초연하고, 때로는 아무렇지 않은, 그런 대인배가 되는 것이라고, 오랜 시간 동안 생각해 왔고, 노력해 왔다.
그래서 매우 무뎌지고 싶었던 것 같다. 감정이 올라올 때마다, 겨우 이걸로 자극되냐고 자책하면서, “무뎌짐을 연습“했던 것 같다.
그렇지만 하는 방법이 틀렸다.
오히려 이것은 곧, ‘섬세하고 부드럽고 민감하고 공감하는’ 고유의 디테일한 인간성을 버리는 것이자, 자기를 마취하고, 덜 민감하게 하고, 둔감하게 하고, 저능아스럽게 만드는 방법이다.
오히려 성숙함이란, 내 눈에 이상한 것들이 잘 안 보이도록 하고, 좀 덜 민감하게 느껴서, 그걸 적당히 지나가는 게 아니라,
너무 잘 보이고 세세히 느끼고 정말로 감당이 안 되는데, 그것을 어떻게든 지적으로 이해해 보려 하고, “인지적으로 이해와 납득, 해석의 과정을 거치고“, 그 후 판단에 따라 결정하는 것에 가까운 지능과 사고의 기술에 통달한 것이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아이가 나에게 패드립을 쳤다고 하면,
전자의 방식(내가 성숙함을 추구한 방식)은, ‘어? 내가 잘못 들었겠지’라거나, 또는, ’패드립을 들었지만 난 안들은것 같다’라는 자기 합리화라 한다면,
후자는, 대체 저 아이가 왜 내게 패드립을 쳤으며, 그것은 어떤 컨텍스트에서 나왔고, 저 패드립은 저 아이가 무슨 말을 전달하고자 한 것이며, 진짜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등을 고려하여, 당장의 나를 찌르는 말과 행동에 대해서 당연한 ‘분노와 같은 반응‘이 발생하는 것을 좀 밀어두고, 그 뒤에 지적인 판단 후, 상황이 이해되고 납득되면, “그 결과로” 못 들은 척 해 줄 수도 있는 것이다.
당연히 후자가 훨씬 힘이 많이 들고, 인간에 대한 이해와 상대방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며, 내가 어떤 것을 받아들일지 말지(또는 받아들이는게 가능한지)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필요하고,
그보다 먼저, 어떤 미친 말을 듣고, 별 꼴을 볼 때의 자동적 감정 반응을 억누를 만한, 고도의 훈련과 자기만의 방법이 필요하다.
그런데, 나는 ‘무딘 감각자’로 살기를 자처했었다.
그런데 과거에 나는 오랫동안, 특히 가정에 대한 책임감으로, 무디게 되자고 생각하고 살고자 했던 것 같다.
나는 이 미친 세상과, 송곳처럼 찌르는 그 무언가들을 버티고 살기 위해, ”무감각해지는 것“이 곧 성숙이며 남자다움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어떻게 보면 패드립 같은걸 제정신으로 받아들이기 위한 일종의 방어적 행동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이렇게 살았던 세월은 결국, 내가 ‘느끼고, 감각하는 능력’을 줄여 버리는 것이고, 5000만 픽셀 카메라를 200만 화소로 떨구는 것이고, 머리 위에 뿌연 비닐봉투를 씌워서, 모든 것을 밋밋하고 흐릿한 덩어리로 만들어 버리는 일이다.
불행하게도 30대의 과반을 이런 방식 즉 “무뎌지는” 방향으로 살았던지라, 이렇게 다시 되돌리는 것이 고통스럽다.
왜냐하면, 다시 살 에는 찬바람을 느끼고, 송곳같은 악의에 찔리는 아픔을 느끼고, 경멸하는 눈빛 등을 견디는 따위의 일 등을 직면해야 하기 때문이리라.
그렇지만 작은 것에도 기쁨을 느끼는 섬세함과, 어떤 작고 소중한 것들을 발견할 수 있는 능력을 도리어 찾을 수 있겠지, 하고 기대해 본다.
아이러니하게도 한동안 회복하려 발버둥을 친 결과로 감정과 생각과 몸은 차차 회복해 갔지만, 그게 오히려 너무 나를 민감하게 만들어서,
그렇게도 전 회사가 견디기 어려웠나 보고,
전에는 그저 내가 듣고 기억 한구석에 쌓아놓았던 온갖 험한 말들과 괴로운 상황들이 문득문득 떠오르다 못해 꿈에서도 나타나서 날 괴롭히고, 내가 그런 취급을 받았구나 하고 다시 되새김질하듯이 더 괴로운 쓴맛을 느끼고 있지만,
이 과정이 지나가면, 아픈 게 무감각해서 의연해 보이는 “무딘 자” 대신, 항상 아프고 괴롭지만 꾹 참고, 잘 생각하고, 이해하고, 납득하고, 감당하는 자, 그래서 결국 의연해지는 그런 성숙해진 자신을 보게 될까. 그리고 그걸 기특해할 날이 올까.
그 전까진, 아마 묻어놨던 온갖 거칠고, 무겁고, 괴로운 것들을 마음 속에서 꺼내서, 아픔을 느낀 후, 소화해서 넘기는 것들을 지속해 나가는 일을 계속해야 할 것 같다.
마치 상처 자체보다, 그것 때문에 생긴 염증 반응이 더 괴롭지만, 그래야만 상처가 덧나지 않고 잘 나을 수 있는 그런 사람 몸의 치유 메커니즘과 본질적으로는 같다고 생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