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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을 치고 싶지만 칠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도망을 칠 수 없도록 현실이 얽어매어서,
도저히 거기서 견디지 않고는 옴짝달싹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제 인생에서, 도망칠 수 없었던 것들은
향후 제 인생의 막바지에야 진정한 평가를 할 수 있겠지만,
대체로 그 당시에는 정말 괴로운 기억들,
그러나 이후에는 "나를 만든 기억들"로 남아 있습니다.
사실, 도망칠 수 없어서 견뎠던 것들로 인해,
특유의 독특한 저의 삶의 모습을 살아가고 있는 셈입니다.
그것이 제 인생인 것 같습니다.
1. 사회로부터의 도망
대학 시절, 저는 사람들이 떠넘기는 감투를 도망치지 못했습니다.
그 때 그 어린 마음에, 가장 가슴이 아팠던 것은,
사람들은 모두 이기적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자기들이 떠넘긴 회장 자리에서, 제가 이끌어가는 대로 따라오지 않았고,
동기/선배들의 외면 아래, 자비로 달에 몇십씩 신입생들 밥을 먹였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과 함께 모임을 이끌어가는 것은 어려웠습니다.
이학년 일 년 동안 처절한 실패를 경험하고,
(그 때 남았던 신입생은 겨우 두세명 정도였습니다.)
삼학년 때, 너무 힘든 나머지, 제 부족함을 인정하고,
똘똘한 신입생들 중 몇명을 으쌰으쌰 하여 권한과 책임을 주고, 마음껏 놀도록 했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동아리를 만들 수 있도록 지원하고,
그들을 돋보이게 했습니다.
결과는 일년만에 신입생 20여명, 그 다음년도 신입생 20여명,
제가 졸업시에는 전체 재학생 60명 정도의 대규모 동아리가 되었고,
저는 그저 한 일 없이 제 짐을 덜 수 있었고, 무언가를 배웠습니다.
사실, 제가 이전에도 지금도 저의 팀원들과 일하는 방식은
이 때 배운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각자 잘 하는 것을 잘 하게 하고, 권한을 주고, 놀게 하고, 자랑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2. 핑계로부터의 도망
대학원 시절, 저는 절망적인 연구실 생활에서 도망치지 못했습니다.
건강도 잃고, 시간도 잃고, 커리어도 박살이 났습니다.
몇 년 간을 교수님 대포통장에 돈을 꽂아 주는 노예처럼 살았습니다.
기왕 잃어버린 건강, 군면제 받고 도망가려고 했으나, 요건이 1달 전 강화되는 나머지,
꼼짝없이 대체복무로 연구실에서 고통을 받아야 했습니다.
수능을 다시 보고자 준비했지만, 누가 노트북이 든 가방을 훔쳐갔습니다.
연구실에서 잠자며 버티다가, 일주일에 한 번 집에 올까말까 하는 일이 지속되며,
연구자로서의 커리어를 못 쌓고 있었습니다.
이것들이 저에게는 매우 견디기 어려운 분노와 좌절이었던 것 같습니다.
학생 지도를 등한시하고, 전공과 상관없는 산학 과제를 엄청 따 오는
지도교수님께도 너무나 실망이 컸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핑계거리가 되었죠. 이런 환경들 때문에 내가 망가졌다는 식으로요.
그러나 마치 장벽과 같았던 박사 졸업장의 압박은,
제가 진정 특정 연구에 매몰되지 않고, 유행하는 연구를 답습하지 않고,
특정한 문제를 유형화하고 이것을 구체화하여, 해결할 매력이 있는 문제로 만들고,
그 문제가 어떤 경우에 도움이 될지를 설득하는 과정이 학위 과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쉽게 풀렸습니다.
유행하는 연구, 선배들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연구를 답습하는 사람들보다,
좀 더 세부적인 것을 보고, 필요성을 찾고, 어필하고, 설득하고, 적정 방법을 연결하는 방식으로
연구와 엔지니어링적 관점을 확립하게 된 이후,
저는 전 회사와 이번 회사에서 이 점을 저의 장점으로 하여 먹고 살고 있습니다.
3. 인간관계로부터의 도망
지금 저는 다시금, 도망치고자 하는 상황에 직면해 있습니다.
모종의 일로, 믿고 있었던 모든 것이 박살이 나 버렸습니다.
시간이 지나서, 정신없던 소음이 그치고, 홀로 가만히 생각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제가 한동안 못 하고 있었던 몇몇 것들을 다시 복구하면서, 현타가 오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먹고 싶은 것을 먹고, 가고 싶은 곳을 가는 것,
나의 생각과 가치관을 거리낌없이 말할 수 있는 곳들을 찾는 것,
타인의 감정이 나에게 투사되는 것을 거부하고, 나를 보호하게 되는 것,
지난 수년동안 전혀 하지 못하고 있었던 가족들과의 안부를 나누는 것,
등등
이런 것들이 회복되다 보니, 상대적으로 위의 것들이 없었던 지난 몇 년간의 삶이
너무 허무하여 견딜 수가 없습니다.
저는 그저 제 자아가 축소되면, 모두에게 유익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근데 상담에서는 "자기 희생 도식"이라고 하며 벗어나야 된다고 하고,
이런 것들은, 저와 사람들의 대등한 관계를 파괴하여, 결국,
모두에게 어려운 상황을 가져왔습니다.
저는 아직도, "나를 그렇게 대하지 말라"고 하지 못한, 과거의 제 자신이 괴롭습니다.
도망을 가고 싶습니다.
나를 보호하고 싶습니다.
소극적으로라도 그렇게 하고 있는데, 그래도 머릿 속에 맴도는 생각은 저를 괴롭힙니다.
제 평생 그 누구도 차단 리스트에 올린 적이 없고, SNS친구를 끊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너무 아파서 모든 것을 다 도려내 버리고 싶습니다.
그렇지만 그저 도망으로 끝나면 안 된다는 것을 위 두 번의 경험처럼
저는 알고 있습니다.
잠시 간의 도망은 숨을 고르는데 도움이 되겠지만, 결국은 맞서야 합니다.
"내가 내 모든 것, 자아를 죽여서도 그렇게 힘들게 살았는데도 이렇게 된 것이라면,
내가 그 누구를 믿고 앞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가"
라는 현재의 자조적이고 절망적인 상황에서,
- 혼자 살든지
- 또는 변하지 않을 사람을 찾아내든지
- 아니면 사람이 변하지 않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찾든지 (매력UP?)
- 아니면 변해 갈 인연에 연연하지 않고, 대신 지금처럼 후회하지 않도록, 자신있게 살든지
위 네개 중에 한두개 이상을 장착하기 전까지는,
왠지 도망갈 수 없을 것 같은 마음이 듭니다.
몇 년 이후에 저는 현재 이 상황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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